조선 중기의 위항시인(委巷詩人). 자는 만리(萬里). 천인의 신분으로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렸다. 언제 출생하였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유희경(劉希慶), 정치(鄭致)와 함께 노닐었다는 '이향견문록 里鄕見聞錄'을 보거나 허봉(許○), 심희수(沈希洙) 등과 더불어 터놓고 사귀었다는 '학산초담 鶴山樵談'의 기록을 참조한다면 아마도 1550년 전후에 태어났던 것 같다. 자신의 시에서 군함과 수운을 맡고 있는 전함사(典艦司)의 노예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있으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허균(許筠)은 그가 궁궐의 열쇠와 왕명의 전달을 책임맡은 액정서(掖庭署)의 사약(司○)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잡직이기는 하지만 정6품의 자리였다. 그가 어떠한 경로로 그 지위까지 올랐는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시를 본뜨는 시체(詩體)를 사약체라 이름하였다. 대체로 만당(○唐)의 풍을 본떠 위약(萎弱)한 시를 지었다고 일컬어졌다. 1590년 통신사 허성(許筬)을 따라 일본에 갔으며, 이 때문에 일본을 잘 안다고 해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 이일(李鎰)을 따라 상주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같은 천인으로 시를 잘 지은 유희경과 함께 유(劉), 백(白)으로 일컬어졌다. 같은 처지의 위항인끼리 모여 시를 짓는 모임인 풍월향도(風月香徒)를 주도하였다. 그의 시는 '취음 醉吟', '추일 秋日' 두편밖에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시세계는 알 수 없으나, 불평원울지기(不平寃鬱之氣)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