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선비. 자는 영중(瑩仲). 호는 청계(靑溪). 아버지는 교위 예범(禮範)이다. 안동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뜻이 높아 기묘명유(己卯名儒)들을 찾아 가르침을 배워 견문을 넓히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또한, 음사(淫祠: 邪神을 祭祀하는 사당)나 귀신은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기고 이를 멀리하매 무당이 그의 마을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을 남쪽 산에 염흥방(廉興邦)의 사당이 있었는데, 그는 '네가 전조(前朝: 고려)의 간신으로서 죽었어도 남은 죄가 있는 터에 어찌 너의 귀신을 용납하여 백성들을 미혹(迷惑)하게 하랴. ' 하고 이를 헐어버렸다. 그는 다섯 아들에게 '사람이 차라리 곧은 도(道)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무도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으니,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고, 만약 소인으로 산다면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 '라고 훈계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