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사인. 자는 숙오(叔敖). 호는 불우당(不憂堂), 불우재(不憂齋), 불우헌(不憂軒). 조부는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윤창세(尹昌世)이다. 아버지는 한성서윤(漢城庶尹) 윤흡(尹○)이며, 어머니는 남원윤씨(南原尹氏) 윤기(尹祈)의 딸이다. 연안김씨(延安金氏) 김후(金○)의 딸과 결혼하여 7남 1녀를 낳았다. 어려서 외숙 도정(都正) 윤천구(尹天衢)의 슬하에서 자랐는데, 도정이 아들이 없어 그를 아들처럼 여겼다. 화락하고 평이하여 외모를 꾸미지 않았으며, 젊어서는 과거 공부를 하기도 하였으나 곧 그만 두었다. 빈천한 것을 슬퍼하지 않고, 명리에 급급하지 않은 채 초야에서 한가롭게 노닐다가 1684년 6월 16일 70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윤증(尹拯)과 교분이 있어, 사후 그가 묘갈명을 지었다. 묘는 이산현(尼山縣) 남쪽 입석향(立石鄕)에 있었다가, 1685년(숙종 11)에 선조 묘소의 맞은편 산 적암(積巖)의 동쪽 산기슭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