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사인. 자는 공도(公度). 조부는 윤이(尹伊), 아버지는 선조(宣祖) 대에 형조판서(刑曹判書)와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칠계군(漆溪君) 윤탁연(尹卓然)이다. 해주정씨(海洲鄭氏) 해성군(海城君) 정흠(鄭欽)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후사를 얻지 못하여 종제 윤복원(尹復元)의 둘째 아들 윤안기(尹安基)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어려서 체소(體素) 이춘영(李春英)의 문하에서 '사기(史記)'를 배웠는데, 기억력이 탁월하여 '소진전(蘇秦傳)'을 한번 배우고 나서 한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외웠다고 한다. 그밖에 여러 고문과 사서(史書)에도 박학하였다. 칠언 근체시(七言近體詩)를 깊이 탐구하여 시에도 능하였는데, 일찍이 소암(疎菴) 임숙영(任叔英)은 윤희원의 시를 두고 ' 윤공도의 시는 그의 사람됨처럼 깨끗하다. '라고 평하였다. 효성 또한 지극하여 모친을 극진히 봉양하였다. 1654년(효종 5) 광주(廣州) 선영 곁에 있던 묘를 병좌임향(丙坐壬向)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