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사대부 화가. 자는 수길(秀吉). 호는 낙파(駱坡), 낙촌(駱村) 또는 학록(鶴麓).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 성종의 11자)의 종증손이다. 서화에 능하였고 동생 영윤(英胤)과 두 아들 그리고 서자인 징(澄) 모두 그림과 글씨에 능하였다. 학림수(鶴林守)를 제수받았고 뒤에 학림정(鶴林正)에 봉해졌다. 중국에 사절로 2회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때는 왕의 서행(西幸)을 보좌하지 않고 산속으로 피신하였다고 하여 사헌부 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30년 연상인 절파풍(浙派風)의 대가 김시(金○)와 친밀하게 교유하면서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 후기의 남태응(南泰膺)은 '청죽화사 聽竹畵史'에서 그의 그림이 고담(枯淡)한 가운데 정취가 있고 거칠고 성근 맛이 하나도 없어 '김시와 비교해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평하였었다. 그리고 윤두서(尹斗緖)는 그의 그림에 대하여 강하고 굳고 우아하고 깨끗하나 협소함이 한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그림들은 대체로 소경(小景)산수인물화와 동물화들인데 모두 조선 중기 절파화풍의 특징을 보여준다. 소경산수인물화는 최립(崔○)의 발문과 찬시(贊詩)가 있는 '인물화첩'(호림미술관 소장)이 그의 진작으로 가장 신빙도가 높다. 이밖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산수도', '탁족도 濯足圖' 등이 그의 대표적인 전칭작이다. 동물화에서는 흑백대비의 묵법(墨法)이 강조되고 한국적인 정취가 넘치는 말과 소와 개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간송미술관에 유작들이 다소 전한다. 김시와 함께 절파화풍의 정착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16세기 후반의 조선 중기 화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