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인. 자는 자건(子建). 호는 추산(秋山). 희룡(熙龍)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교관(敎官) 복경(福慶)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99년(선조 32) 진사시에 급제, 1609년(광해군 1) 참봉, 사산현감(四山縣監)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고,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김제남(金悌男), 이원익(李元翼), 남이공(南以恭), 정택뢰(鄭澤雷) 등을 변호하고, 폐모의 논을 일으킨 이이첨(李爾瞻), 윤인(尹○), 정조(鄭造), 이위경(李偉卿) 등의 탄핵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 이정구(李廷龜), 이식(李植), 이항복(李恒福), 서성(徐省), 김상헌(金尙憲) 등 당시의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관직에 기용되었다. 저서로는 '추산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