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의 무신, 학자. 자는 백영(伯榮). 호는 산남(山南). 생원 김유(金綏)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경상북도 예안에서 살았다.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문과에 실패하고 무과에 급제한 후 창성부사, 이조좌랑,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을 때 빈강청(賓講廳)에서 '춘추좌전 春秋左傳'을 막힘없이 통해(通解)하여 그의 문명이 더욱 드러났으며, 창성부사로 있을 때 병마절도사 김수문(金秀文)과 함께 서해평(西海坪)정벌에 공을 세웠다. 관직에서 물러나 경학(經學)에 힘쓰면서 장구(章句)의 분석적 해석보다 근본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함을 학문연구의 토대로 삼았으며, ' 자경편 自警編 '을 저술하여 실천을 위주로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한다. 저서로는 '산남집'이 있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경상북도 예안에서 살았다.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문과에 실패하고 무과에 급제한 후 창성부사, 이조좌랑,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을 때 빈강청(賓講廳)에서 '춘추좌전 春秋左傳'을 막힘없이 통해(通解)하여 그의 문명이 더욱 드러났으며, 창성부사로 있을 때 병마절도사 김수문(金秀文)과 함께 서해평(西海坪)정벌에 공을 세웠다. 관직에서 물러나 경학(經學)에 힘쓰면서 장구(章句)의 분석적 해석보다 근본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함을 학문연구의 토대로 삼았으며, ' 자경편 自警編 '을 저술하여 실천을 위주로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한다. 저서로는 '산남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