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지용(李址鎔)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1870 ~ ?
조선 말기의 친일파, 을사오적의 한사람. 초명은 은용(垠鎔). 자는 경천(景川). 호는 향운(響雲). 완영군(完永君) 재긍(載兢)의 아들이다. 1887년(고종 2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89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에 궁내부협판이 되고 이듬해 주일전권공사로 의정부찬정에 올랐으며, 1903년에 다시 주일전권공사를 지낸 뒤 이듬해 2월 23일에는 외부대신서리로서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협정, 조인하였다. 이에 온 국민의 비난이 상당히 높아 의정서 체결의 당사자인 그와 참사관 인 통역 구완희(具完喜)를 매국노로 규탄하고, 그들의 집에 폭탄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그 대책으로 추밀원의장 인 이토(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우리나라에 보내어 이른바 친선을 강조하면서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고, 우리나라에서도 3월 26일 그를 일본국 보빙대사(報聘大使)로 특파하였다. 귀국한 뒤 법부대신, 규장각학사, 판돈령부사, 교육부총감 등을 거쳐 1905년 농상공부대신, 내부대신을 역임하였는데,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조인에 서명함으로써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규탄을 받고, 격앙된 군중에 의하여 집이 방화되었다. 1907년 5월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고, 1910년 일본정부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