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용숙(李容肅)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1818 ~ ?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경지(敬之). 1866년(고종 3)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황주 삼전면 송산리 앞에 정박하자 역관으로 황주목사 정대식(丁大植)을 수행하여 접견하고 입국의 사유를 물었고, 1876년 4월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를 수행하여, 별견당상역관(別遣堂上譯官)으로 20일간 체류하면서 일본의 신식기관과 시설을 사찰하고 돌아왔다. 1879년 음력 7월 무비자강(武備自强)을 위한 청국 에의 학도파견을 교섭하기 위하여 헌서뇌자관(憲書○○咨官)으로 파견되어 이유원(李裕元)의 밀서를 유지개(游智開)를 통하여 이홍장(李鴻章)에게 전달하고 병기제조와 군사훈련 등 무비자강문제에 대한 자문과 지원을 요청하여 그 약속을 받아냈는데, 이는 학조기계사(學造機械事)를 추진한 최초의 교섭이었다. 1880년 6월 제2차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별견한학당상(別遣漢學堂上)이 되어 한달동안 동경에 체류하며 일본의 발전상을 시찰하고, 특히 주일청국공사(駐日淸國公使) 하여장(何如璋) 과의 6차의 회담을 통하여 세계의 대세, 통상상의 실무적 문제, 그리고 조선의 외교정책의 진로 등에 대하여 식견을 넓히고 돌아왔다. 1881년 1월 뇌자관(○○咨官)으로 재차 청나라에 파견되어 이홍장에게 무비학습과 함께 통상문제에 있어서 세제, 세율, 세관설치 등에 대한 동의와 자문을 요청하여 중국 측의 지원 약속을 받는 데 성공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후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갈 때 대원군을 수행하여 청나라 진영으로 마건충(馬建忠)을 방문하였으나 대원군은 체포되어 톈진(天津)에 호송되었다. 민비정권의 부활로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조영하(趙寧夏)가 청나라에 갈 때 김홍집과 함께 수행하여 톈진에 납치되어 있는 대원군을 변원규(卞元圭)와 함께 방문하였다. 역관 출신으로서 외교면에 활약이 많았으며 '전주이씨세보 全州李氏世譜'를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