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문인, 순국지사. 자는 화옥(華玉). 호는 동방일사(東方一士), 연재(淵齋). 충청남도 회덕(懷德) 출생.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참의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종질이며, 병순(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달수 에게서 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다. 달수가 죽은 뒤 가학(家學)이 기울어갈 것을 염려하여 더욱 학문에 진력하였으며, 근수와 외할아버지의 지도를 받았다. 독서하는 여가에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송시열 등 거유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 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속록 近思續錄' 이라 하였다. 1878년(고종 15)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뒤 경연관(經筵官), 서연관(書筵官),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0년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죽자,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소공시마복(小功○麻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뒤 고종이 은사를 베풀고자 하여 높은 관작으로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그때에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두문자정(杜門自靖)하였으며, 이듬해 옥주(沃州)의 산속 물가에 누벽정(樓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승품(陞品)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를 엄금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4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洪氏)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복상(服喪)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이어서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속아서 납치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그해 음력 12월 30일 국권피탈에 통분하여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오적의 처형,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고, 1914년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배향하였으며, 이는 1970년 충청남도 대전광역시 용운동으로 이전되어 용동서원(龍洞書院)이라고도 불린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무계만집 武溪○輯'이 있으며, 문집으로 '연재집'이 간행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