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대신. 호는 만암(滿庵), 포암(蒲庵). 경기도 여주 출신. 준호(峻鎬)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가세가 빈한하여 어머니의 훈도를 받았다. 1879년(고종 6) 4월 무과에 급제하고, 1883년 운봉현감(雲峰縣監)을 거쳐 1886년 1월 전라도어사, 그해 11월 충청도어사를 역임하였다. 1892년 6월 충주목사, 1893년 상주목사를 지냈고,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이 성립되자 궁내부회계원 출납사장(出納司長)에 임명되었다가 곧 일본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1895년 2월 군부협판에 임명되고, 이듬해 6월 경무사(警務使)를 겸임하였다. 1898년 2월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그해 4월 군부대신이 되었고, 수구파의 거두로서 그해 7월 황국협회를 조직하여 보부상을 동원, 독립협회를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그해 7월 탁지부대신이 되었고, 8월 경무사를 겸임하였다. 1899년 12월 농상공부대신이 되었으나 안경수사건(安○壽事件)으로 고군산(古群山)에 유배되었다. 1902년 특별방면되어 1904년 평안북도관찰사, 1905년 박제순내각(朴齊純內閣)의 탁지부대신을 역임하였다. 이때 재정시찰 목적으로 일본에 가서 일본 천황을 만나고 훈일등(勳一等)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고 귀국, 태극장을 받았다. 그해 을사조약 체결 때 한규설(韓圭卨)과 함께 조약에 반대하였다. 1906년 2월 군부대신서리를 역임하였다.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부총재와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을 지냈다. 1910년 경술국치 때는 그가 조직한 대한상무조합(大韓商務組合)이 병합청원을 낸 일진회(一進會)의 행동에 지지를 보냈다. 국권상실 후 일본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