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관료. 초명은 박(博). 함경북도 경성 출신. 1882년(고종 19) 서울에 올라왔고, 이듬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산하의 동문학(同文學)의 사사(司事)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31일자로 창간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 기자가 되었다. 그것은 동문학에서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신설된 박문국(博文局)에 차출되어 관인(官人)으로서 신문제작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 후 수구파에 의하여 습격을 받아 박문국 사가 불타버리자 신문은 자연히 못 나왔다. 그뒤 1886년 6월 25일 다시 '한성주보 漢城周報'가 새로 마련한 교동 소재의 박문국 사에서 창간되자 편집책임자로서 활약하였다. '한성순보'는 한문으로 된 순간지(旬刊紙)였으나 '한성주보'는 국한문을 섞어쓴 주간지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법무아문(法務衙門)의 참의(參議), 협판(協辦) 등을 거쳐 1896년 김홍집(金弘集)내각 때 법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신문기자출신의 최초의 대신이 된 것이다. 그러나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황태자가 러시아공관으로 파천(播遷)한 뒤 김홍집 내각 전원을 역적으로 규정, 김홍집 등 세 각료가 살해되었다. 이때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 등과 더불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때부터 이름을 석주 라 변명한 뒤 10여년의 망명생활에 들어갔다. 1907년 이완용(李完用) 내각 때 귀국하여 궁내부특진관, 제실회계감사원경(帝室會計監○院卿)을 역임, 1910년 일본정부로부터 남작(男爵)을 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