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변수(邊燧)
  • 원주변씨(原州邊氏),  출생~사망 : 1861 ~ 1892
조선 말기의 개화파 정치인. 일명 수(樹). 자는 한명(漢明). 호는 소천(小泉). 할아버지는 준(準)이고, 진환(晉桓)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강릉최씨(江陵崔氏)이다. 아버지 친구인 강위(姜瑋)가 스승이었기 때문에 그와 절친하였던 김옥균(金玉均)이 1882년(고종 19) 일본을 시찰할 때 수행하였다. 이때 일본 경도(京都)에서 양잠술과 화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다가 그해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군란이 진압되고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자 수신사절 박영효(朴泳孝)의 수행원으로 김옥균, 서광범(徐光範), 민영익(閔泳翊) 등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차관교섭을 벌여 국채위임장에 대한 보장을 받고 이듬해 3월 귀국하였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에 따라 1883년 5월에 공사 푸트(Foote, A. L.)가 내한하자 6월 11일 전권대신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홍영식(洪英植), 서광범, 유길준(兪吉濬) 등과 함께 미국에 갔다가 이듬해 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인 1884년 7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로 임용되었으며, 이어 8월에는 군국사무아문(軍國事務衙門)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같은해 12월 갑신정변 때 대궐 안의 사정을 신속하게 탐지하여 김옥균 등의 독립당 활동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고, 일본군의 출동을 교섭하여 연경당(演慶堂)의 경비를 맡게 되었다. 그뒤 외아문참의(外衙門參議)로 승진, 전임되었다. 그러나 독립당의 삼일천하내각이 무너지자 독립당 요인들과 같이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6년 1월 민주호(閔周鎬), 윤정식(尹定植) 등과 미국으로 건너가 베어리츠언어학교를 수료한 뒤, 1887년 9월 메릴랜드주립농과대학에 입학하여 1891년 6월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취득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생이 되었다. 대학 재학시절인 1890년부터 미국 농무성의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며, 1891년 9월 농무성통계국 월보 제89호에 '일본의 농업'이라는 글을 싣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 대학정거장에서 급행열차에 치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