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금구대접주(金溝大接主). 호는 용계(龍溪). 전라북도 김제 출신. 아버지는 한기(漢驥),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다. 1891년 동학의 접주가 되어이 지방에 순회 온 제2세교조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여러가지 가르침을 받았다. 이듬해에 전라북도 삼례에서 벌어진 동학교도 교조신원운동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 참가하였다. 1893년에는 보은 장내리(帳內里)집회에 참가, 여기서 금구포(金溝包)라는 포명과 대접주의 임첩(任帖)을 받았다. 1894년에 전봉준(全琫準), 손화중(孫華仲), 김개남(金開南)과 더불어 호남창의소를 설치, 동학운동의 횃불을 올렸는데, 오시영(吳時泳)과 더불어 총참모가 되어 운동 초기부터 전봉준의 주력을 이루었다. 금구 원평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졌는데, 그 휘하의 유명한 접주로 최경선(崔景善), 김봉년(金奉年), 김사엽(金士曄), 김봉득(金鳳得), 유한필(劉漢弼)과 같은 패기에 넘치는 젊은이가 있었다. 전봉준과 행동을 같이하여 전봉준이 공주공략에서 패하여 금구 원평에 와서 재수습할 때 그와 함께 동학군을 재편성, 12월 21일 8천명의 병력으로 포진, 일본군과 항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몸을 피해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安靜寺洞)에 숨었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 4월 23일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처형되었다. 초명은 준상(峻相), 자는 덕명(德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