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효자. 자는 유신(幼新). 호는 용계(龍溪). 증판서 승세(升世)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였다. 어버이가 병이 들어 위독할 때 똥 맛을 보고 경중을 짐작하였고, 임종이 가까워져서는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내어 먹이는 등 갖은 수단을 다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을 시묘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생각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거상중이었는데,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영연(靈筵)을 모셔다가 아우 희에게 부탁하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뒤 행재소로 달려가다가 여산(礪山)에 이르러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향리로 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김류(金○), 신흠(申欽) 등 당시 재상들과 같이 난을 평정하는 데 충성을 다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소무공신(昭武功臣)1등과 영사공신(寧社功臣)2등에 녹훈되고 이어서 병조좌랑에 기용되었다. 그뒤 감찰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의금부도사로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였으며, 난이 평정되자 그 공으로 남원부사가 되었다. 뒤에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남원의 절의사(節義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