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지남(李至男)
  • 연안이씨(延安李氏),  출생~사망 : 1529 ~ 1577
조선 중기의 효자. 자는 단례(端禮). 호는 영응선생(永膺先生). 을사에 화를 입은 장령 언침(彦○)의 아들이다.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에게 배워 스스로 힘써 행할 줄 알았으므로 모두들 효성있는 자라고 일컬었다. 아버지가 직언으로 탄핵을 받고 순창군수로 좌천되자 따라갔는데, 마침 군내에 김인후(金麟厚)가 살고 있었으므로 그의 제자가 되었다. 김인후가 자를 지어주고, 자설까지 지어주었으며, 또 이때 이중호(李仲虎) 에게도 배웠다. 뒤에 아버지가 서천으로 귀양가서 죽게 되자 지성으로 장사지내고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지냈으므로, 나이 20도 못되어 지효(至孝) 라는 이름이 널리 퍼졌다. 1577년(선조 10) 나라 안에 학행이 있는 선비를 천거할 때 소격서의 참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해에 어머니 안씨가 이질을 앓아서 증세가 위급하자 목욕하고 울부짖으며 하늘에 호소하여 감동시켰다. 즉, 어머니는 차츰 회복되었으나 그는 오랫동안 시탕(侍湯)과 간호에 지쳐서 피를 토하다가 그해 8월에 죽으니 사람들이 연안의 읍호(邑號)를 따라 ' 영응선생 '이라 하였다. 기직(基稷), 기설(基卨) 두 아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쌍벽(雙壁), 연주(聯珠)라고 일컬었다. 맏아들 기직은 아버지의 상사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23세에 죽고, 시집 안 간 누이는 애통해하다가 18세에 죽으니 향교구동(鄕校舊洞)에 사는 사람들이 지극한 효성을 조정에 알려, 인조의 특명으로 효자문과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 따라서 어머니 안씨와 부인 정씨, 아들 기직, 기설, 딸이 모두 그와 더불어 표창을 받아 한 집에 여섯 정문이 세워졌으며, 임금이 효자삼세(孝子三世)라는 편액을 내렸다. 그뒤 또 기설의 아들 돈오(惇五), 돈서(惇敍) 및 돈오의 처 김씨가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하여 모두 정려됨으로써, 여덟개의 정문이라는 뜻에서 팔홍문(八紅門)이라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