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학자. 호는 금계(錦溪). 1840년(헌종 6) 11월 12일 지평현(砥平縣) 금리(錦里)에서 이양흡(李養翕)의 아들로 태어났다. 27세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올렸다. 29세 때에 스승인 화서가 죽자 그 해에 과거 시험을 포기하면서 '행자설(幸字說)'을 지었다. 그 내용은 요행을 바라는 것이 바른 도리에 벗어나는 것으로 온갖 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38세 때에 유기일(柳基一)이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를 비난하자 편지를 보내 그의 그릇됨을 지적하였다. 49세 때에는 홍재구(洪在龜)가 성재의 심설(心說)을 비난하자 유인석(柳麟錫), 유중악(柳重岳)과 함께 연명으로 편지를 보내 성재를 옹호하였다. 67세 때인 1906년에 일진회(一進會)의 정혁선(鄭赫善)이 금계가 의병을 일으키려 했다고 무고하여 여주헌병대(驪州憲兵隊)에 잡혀 갔다. 1910년에는 일본 왕이 내리는 은사금(恩賜金)을 받지 않고 거부하다가 지평헌병분견소에 7일 동안 갇혀 고문을 받다가 돌아왔다. 1915년에는 '송서약선(宋書略選)' 10권을 편찬하였다. 금계는 1918년 2월 8일 향년 79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금계의 심성설(心性說)에 대한 입장은 홍재구가 유중교를 비난하는 태도에 반박하면서도 유중교와 화서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밝히는데 있다. 그는 명덕(明德)을 이(理)라 파악하였다. 또한 심(心)을 이(理)와 기(氣)가 결합된 것으로서 규정하며 심에서 이가 기의 주재가 되는 것이 심의 본체라 하고 여기에 주리설(主理說)의 근본의미가 있는 것이라 지적한다. 곧 심의 존재론적 본체를 이로만 규정하거나 기라고 한정시키는 것을 벗어나 이기의 결합이라는 전제에 충실하면서도 이가 기를 주재하여야 한다는 주리설의 당위적 의미를 강조하였던 것은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심성설을 온건하게 정립하려는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학문태도의 기본 특징은 경을 학문의 기초로 강조하는 거경론(居敬論)에서 드러난다. 그는 '경(敬)은 마음을 보존하는 양약이다'라 하며 경을 지니지 못하면 인간의 내면에서나 실제 행동에서 혼란과 무리가 발생하여 마음이 병들게 되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경과 의(義)를 평생토록 힘써야 할 기본규범으로 제시하면서 '이 세상에는 한 순간도 경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없으며 한 가지도 의롭지 않아도 되는 일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화서학파의 도학적 기본 정신인 의리론의 문제는 금계에 있어서도 가장 절실하게 추구되었던 과제였다. 그는 '출처론(出處論)'에서 선비가 세상에 나가서 발언하고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나 물러나서 침묵 속에 수양하고 교유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의리의 마땅함이 일정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큰 뜻이 있는 군자가 일할 만한 정당한 세상에서는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지만 부당한 세상에 나아가 출세나 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른다면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는 것이 의리에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금계는 동문인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을 하는 것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찬양하였다. 반면 나아가서 나라를 붙잡는 것과 물러나서 나라를 붙잡는 것이 같은 의리라 제시하면서, 그 자신은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묘는 그가 태어난 금의(錦衣) 마을의 봉미산(鳳尾山) 자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