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의 음악가로서 금(琴)의 명수. 경주의 낭산(狼山) 밑에 살던 빈한한 선비로 세사를 달관했던 인물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이름도 성도 알 수 없으며, 가세가 빈곤하여 늘 누더기옷을 입고 다녔는데 그 모양은 마치 메추리가 매달린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백결(百結: 백번을 기웠다는 뜻)선생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일찍이 영계기(榮啓期: 사슴가죽 옷에 새끼띠를 매고 늘 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는 중국 춘추시대의 인물)를 흠모한 나머지 스스로도 금을 타며 인생의 희로애환을 모두 달래어갔다.
어느해 세모를 맞아 이웃에서는 조(粟)를 찧어 별식을 마련하는데, 선생의 집안은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그의 아내가 이같은 가난을 상심하자 그는 곧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무릇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매인 일이어서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상심하는가.'라고 하며, 이내 가야금으로 방아찧는 소리를 연주하여 그의 아내를 위로해주었다. 이때의 음악이 후세에 대악(○樂), 즉 방아악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한편, 영해박씨(寧海朴氏) 족보에는 백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보이는데, 그의 이름은 박문량(朴文良)이며 414년(실성왕 13)에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눌지왕 때 아버지 박제상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순절(殉節)하자 그의 어머니 김씨와 누나인 아기(阿奇)와 아경(阿慶)은 비보를 듣고 이내 자결하였고, 가운데 누나인 아영(阿榮) 만이 남아서 백결을 양육하였다고 한다. 그뒤 아영이 궁중으로 출가하자 그도 함께 입궐하였으며, 장성해서는 각간(角干) 이수현(李壽玄)의 딸과 혼인하여 관직에도 있었다. 478년(자비왕 21) 모든 관직을 떠나 향리로 돌아갔는데, 이때 그는 '낙천악(樂天樂)'이라는 귀향곡을 지어 불렀다고 한다. 더없이 청렴하고 결백했던 그는 궁중으로부터의 일체의 후원을 거절하고 스스로 궁색한 생활을 즐기다가 말년에는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이름도 성도 알 수 없으며, 가세가 빈곤하여 늘 누더기옷을 입고 다녔는데 그 모양은 마치 메추리가 매달린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백결(百結: 백번을 기웠다는 뜻)선생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일찍이 영계기(榮啓期: 사슴가죽 옷에 새끼띠를 매고 늘 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는 중국 춘추시대의 인물)를 흠모한 나머지 스스로도 금을 타며 인생의 희로애환을 모두 달래어갔다.
어느해 세모를 맞아 이웃에서는 조(粟)를 찧어 별식을 마련하는데, 선생의 집안은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그의 아내가 이같은 가난을 상심하자 그는 곧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무릇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매인 일이어서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상심하는가.'라고 하며, 이내 가야금으로 방아찧는 소리를 연주하여 그의 아내를 위로해주었다. 이때의 음악이 후세에 대악(○樂), 즉 방아악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한편, 영해박씨(寧海朴氏) 족보에는 백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보이는데, 그의 이름은 박문량(朴文良)이며 414년(실성왕 13)에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눌지왕 때 아버지 박제상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순절(殉節)하자 그의 어머니 김씨와 누나인 아기(阿奇)와 아경(阿慶)은 비보를 듣고 이내 자결하였고, 가운데 누나인 아영(阿榮) 만이 남아서 백결을 양육하였다고 한다. 그뒤 아영이 궁중으로 출가하자 그도 함께 입궐하였으며, 장성해서는 각간(角干) 이수현(李壽玄)의 딸과 혼인하여 관직에도 있었다. 478년(자비왕 21) 모든 관직을 떠나 향리로 돌아갔는데, 이때 그는 '낙천악(樂天樂)'이라는 귀향곡을 지어 불렀다고 한다. 더없이 청렴하고 결백했던 그는 궁중으로부터의 일체의 후원을 거절하고 스스로 궁색한 생활을 즐기다가 말년에는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