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치문(致文). 호는 덕암(德岩). 수약재(守約齋) 나필은(羅弼殷)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나석증(羅錫曾) 이고 아버지는 나희집(羅禧集)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현임(李鉉臨)의 딸이다. 광주(光州) 광산구(光山區) 대촌(大村)에서 태어났다. 1841년(헌종 7)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예대로 행하였고, 이후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으로 경전과 제자(諸子)의 글을 널리 배웠으며 예학을 탐구하였다. 1851년(철종 2) '항검자설(恒儉字說)'을 지었고, 이어 1852년(철종 3)에 '촌자설(村字說)을, 1853년(철종 4)에는 '심학도설(心學圖說)'을 지었다. 특히 스승인 기정진과 태극음양(太極陰陽)의 이치를 논하는 과정에서 칭찬을 들었고 향도천(鄕道薦)에 오르기도 하였다. 1879년(고종 16) 12월에 스승 기정진의 상을 당하여 통유문(通諭文)과 집상제문(執喪諸文)을 몸소 주관하였으며 '성기잠(誠幾箴)'을 지었다. 1885년(고종 22) 3월 고내상(古內廂) 도산촌(道山村)에서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9월 복룡산(伏龍山)에 장사지냈다가 1890년(고종 27) 석정(石亭) 옛집 근처로 이장(移葬)했다. 저서로 시문집인 '덕암만록(德巖漫錄)' 상, 하권이 남아있는데, 그의 손자인 나종우가 덕암의 유고를 정리한 것이다. 최근 '한국 한시의 이해'(김은수 저)에 그의 문집 내용을 시 위주로 발췌 번역하였다. 그의 행장은 후학인 고광선이 1909년에, 서(序)는 고광선과 고광익이 1921년과 1922년에 각각 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