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긍익(李肯翊)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1736 ~ 1806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장경(長卿). 호는 완산(完山) 또는 연려실(燃藜室). 서울 출생. 광사(匡師)의 아들이다. '연려실'이란 그의 서실(書室)이름으로, 한(漢) 나라의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에 불을 붙여 비추어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것인데, 그의 아버지가 서실벽에 손수 휘호해준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의 가문은 전통적으로 소론에 속하였는데, 경종 대의 신임무옥사건과 1728년의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크게 화를 당하였으며, 그의 나이 20세 때 아버지 광사가 나주 괘서사건에 연루, 유배를 당하여 배소에서 죽었다. 그는 역경과 빈곤 속에서 벼슬을 단념한 채 일생을 야인으로 보냈다.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최립(崔○) 등 서인계열의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동인 및 훈구세력, 영남학파와는 사상적으로 별 관련이 없었다. 그는 특히 양명학(陽明學)계열에 속하였는데, 이는 양명학을 그 집안의 가학(家學)으로서 내수(內修)해왔기 때문이다. 일찍이 장유(張維), 최명길(崔鳴吉)에서 비롯된 양명학은 정제두(鄭齊斗)를 통하여 그에게 전하여졌다. 실제로 '계곡만필 鷄谷漫筆', '학곡집 鶴谷集'을 통하여 장유를 접하였고, '지천집 遲川集'에서 최명길과 대화하였으며, 정제두를 사숙하였다. 한편, 아버지 광사는 정제두의 학을 접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이사하였으며, 정제두의 손녀를 며느리로 맞기까지 하였다. 강화도에서 정제두를 중심으로 한 이들 양명학파를 '강화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명학은 광사 이후 충익(忠翊), 면백(勉伯), 시원(是遠), 상학(象學), 건창(建昌)의 5대를 거치면서 이어져왔다. 그의 역사의식은 '연려실기술'을 통하여 살필 수 있다. 그는 고증을 역사에서 제일의 생명으로 여기고 어디까지나 '술이부작(述而不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신으로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및 유명, 무명 인사를 가리지 않고 자료들을 섭렵, 인용하였으며, 거의 국내자료에 국한하였다. 이것은 한치윤(韓致奫)이 '해동역사'를 쓸 때 외국자료를 통하여 한국사를 이해하려 한 것과 대조된다. 우리의 역사는 내 나라의 자료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자아의식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서술에서 생명으로 다룬 것은 객관성, 공정성, 체계성, 계기성 그리고 현실성이었다. '연려실기술'의 찬술은 이러한 그의 사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 지금까지 역사서술에서 선현을 칭할 때 본명을 직서(直書)하지 않고 호나 자, 시호 등으로 표시해온 것을 비판하면서 역사서술의 공정성을 위해서도 성명의 직서를 강조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실학을 연구한 고증학파 학자로서 조선사연구의 선구자이다. 저서로는 '연려실기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