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 사재감정(司宰監正) 덕문(德文)의 손자로, 영남수군절도사 설개(楔皆)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자야성충순위(藉冶城忠順衛) 송원(宋源)의 딸이고, 부인은 사재감정 신인서(愼仁恕)의 딸이다. 성주 출신.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여러 차례 그의 공거문(公車文: 應試, 應製, 疏章 등의 詩文)이 뽑혔으나 아버지가 비명으로 죽자 과거에 응하지 않고 어머니를 봉양했으며, 동생을 열심히 가르쳐 태학에 올렸으나 일찍이 죽자 더욱더 인사(人事)에 뜻을 잃고 몇 번 천거되었음에도 거절하였다. 또한 끝까지 추만(推挽)하는 자 없이 죽기를 원하였다. 1631년(인조 9) 권대진(權大進) 등이 영남의 최현(崔睍), 승려 천식(天植)과 함께 일으키려고 했던 모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금부도사에게 붙잡혀 추국을 당하기도 하였다. 1637년 천거로 선교랑의 벼슬이 내렸으나 받지 않고 임종 때 벼슬을 쓰지 말고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만 쓰라 했다. 1774년(영조 50)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에 증직되고, 1785년(정조 9) 유림들이 세운 성주의 도천향사(道川鄕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등암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