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이길(耳吉). 호는 하려(下廬). 아버지는 이곤(以坤)이며, 어머니는 배천조씨(白川趙氏)로 경채(景采)의 딸이다. 안정복(安鼎福)을 사사하였다. 형 덕일(德壹)과 함께 경전공부를 열심히 하고 제자백가서를 두루 읽어 15, 16세 때 벌써 학예(學藝)로 이름이 높아 친구가 많았다. 이때 어머니로부터 '명리(名利)를 좋아하는 사람과 교유해서는 안된다. '라는 훈계를 받았는데, 그 뒤로는 함부로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스승으로부터 위기(爲己)의 학문을 배워 일상생활의 윤리로부터 성명(性命), 이기(理氣)의 근원에 이르기까지 깊이 연구하여 그 요령을 얻었다. 따라서, 그의 학문은 해박하고도 요점을 얻었으며, 간략하고도 충실하여 조화의 근원을 꿰뚫고 사물의 이치를 밝혔다. 거처를 '하려(下廬)'라 이름하고 세로(世路)에 인연을 끊은 채 학문탐구에만 몰두하였다. 저서로 '방언 放言', '일용집요 日用輯要', '동현학칙 東賢學則', '도학원류찬언 道學源流纂言'과 '속찬언 續纂言', '삼자실기 三子實記', '사례요의 四禮要儀', '가례익 家禮翼', '동유예설 東儒禮說', '경훈사교록 經訓四敎錄', '사서집록 四書輯錄', '수사연원록 洙泗淵源錄', '도동연원록 道東淵源錄', '증보성현군보록 增補聖賢群輔錄', '척견록 ○見錄', '어류찬語類纂', '초학편初學編', '소대연편 昭代衍編', '고사상고 古史詳攷' 등을 남겼는데, 모두가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내용의 책으로, 옛 성현의 뜻을 계승하여 후세의 학문을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