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우신(虞臣). 호는 숙원(叔園), 수관거사(水觀居士), 폭포암주인(瀑布庵主人). 증조부는 이대성(李大成)이고, 조부는 이진위(李眞偉)이며, 아버지는 이광명(李匡明), 생부는 이광현(李匡顯)이다. 정후일(鄭厚一), 신대우(申大羽), 이광려(李匡呂), 이긍익(李令翊) 등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주요 인물과 친인척이면서 그들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또 정제두(鄭齊斗)의 양명학(陽明學)을 계승, 연구하였고, 유학 이외에 노장(老莊), 선불(禪佛)에 해박하였으며,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를 잘 썼다. 이지(李贄)의 절가순도(絶假順道)에서 영향을 받아 가와 진을 엄격히 구별했고, 공맹(孔孟)의 인의에 가탁(假託)함으로써 인의에 화가 미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1755년(영조 31) 생부와 양부가 모두 을해옥사(乙亥獄事)에 연루되어 생부인 이광현은 영남(嶺南) 기장(機張) 으로, 양부 이광명은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남북으로 오가며 유배된 두 부친을 봉양했다. 또 경세(經世)의 뜻을 실현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불교에 심취하여 강화(江華) 마니산(摩尼山) 망경대(望京臺)에 승려 혜운(慧雲)과 함께 암자를 짓고 폭포암주인(瀑布庵主人)으로 자호(自號)하며 지냈다. 저서로 '초원유고(椒園遺稿)'가 있는데, 필사본으로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담로(談老)', '두시약설(杜詩略說)' 각 1권이 가장(家藏)되어 있었다는데, 현재 전존(傳存) 여부가 불확실하다. 1816년(순조 16) 3월 병으로 졸하였다. 강화(江華) 선도포(仙都浦) 길상산(吉祥山)에 장사지냈다. 1801년(순조 1)에 아들 이면백(李勉伯)이 신유증광사마시(辛酉增廣司馬試)에 생원 3등, 진사 2등으로 합격했고, 1815년(순조 15)에 손자 이시원(李是遠)이 을해정시문과(乙亥庭試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