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숙화(淑華). 호는 완양(完陽), 삽교(○橋). 아버지는 중관(重觀)이다. 안중관은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으로 이병연(李秉淵), 민우수(閔遇洙) 등 당시 노론계 인사 및 홍세태(洪世泰) 같은 중인출신 시인과도 교유한 노론계 학자였다. 1752년(영조 28)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이곳저곳 아버지의 임소(任所)를 따라 생활하였다. 당시 신흥도회가 형성된 홍천, 제천, 원주 등이 그곳으로 청년기를 이러한 도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낸다. 이때 그는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 명예나 권력을 좇는 무리들이 날뛰는 환로(宦路)에서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아니고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사회현실 속에서 심한 갈등을 하게 된다. 결국 세 차례 과거에 응하지만 모두 낙방한다. 출세지향의 공부를 힘쓰지 않았던 그에게 낙방은 오히려 당연하기도 하다. 1752년은 과거에 응한 마지막 해이기도 하지만, 그해 아버지가 죽자 그는 곧 강원도 두메산골인 횡성 삽교(○橋)에 은거한다. 삽교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후반기는 도회적인 생활을 떠나 벼슬을 단념한 채 산중에 은거하는 처사적인 생활이었다. 저서로는 '삽교집', '삽교만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