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정규양(鄭葵陽)
  • 연일정씨(延日鄭氏),  출생~사망 : 1667 ~ 1732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숙향(叔向). 호는 지수(○○). 영천 출신. 아버지는 생원 석주(碩胄)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방렬(邦烈)의 딸이다. 종조부 시연(時衍)과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형 만양(萬陽)과 함께 수학하였고, 경사(經史)는 물론 성리학, 예학, 천문, 지리, 역학, 정치, 경제, 율려(律呂), 과제(科制) 등에 두루 정통하였다. 당시 사림들이 옛날 주돈이(周敦○) 문하의 정호(程顥), 정이(程○) 형제와 비유하였다. 퇴계학에 전념하면서도 이형상(李衡祥), 윤증(尹拯), 정제두(鄭齊斗), 정시한(丁時翰) 등과도 학술토론을 전개하였고, 학파를 초월하여 학문의 진수를 탐구하였다. 1714년(숙종 40) 학행으로 천거되어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형 만양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에 격문을 돌려 향병 수백명을 모아 의병장에 추대되어 규율을 모두 갖추었는데, 관군이 토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그뒤 이남산(尼南山) 밑에 육유재(六有齋), 진수재(進修齋), 옥간정(玉磵亭), 태고와(太古窩, 慕古軒) 등을 짓고 향단(香檀)과 청죽(靑竹)을 심어 선경 속에서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향음주례(鄕○酒禮)와 투호(投壺)의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학설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학론의 사상적 핵심으로 삼아 이(理)는 주(主)요, 기(氣)는 자(資)라 정의하여 형 만양의 논리와 일치하였다. 형제간의 우애를 기리기 위하여 형 만양과 함께 '훈지악보 塤○樂譜'를 지었으며, 모든 저술을 대부분 같이하여 '심경질의 心經質疑', '치도의설 治道擬說', '의례통고 疑禮通攷', '개장비요 改葬備要', '경학연원도 敬學淵源圖', '상의치심단 上醫治心丹', '선천심법도 先天心法圖', '대학차록 大學箚錄' 등 외에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영천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훈지문집' 6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