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성위(聖緯). 호는 윤암(綸菴), 십삼재(十三齋), 사천(麝泉). 조부는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의태(李宜泰)이고, 이소(李○)의 다섯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 김익겸(金益謙)의 딸이다. 동생들은 이희정(李喜禎), 참봉(參奉) 이희명(李喜明), 황사영(黃嗣永)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천주교인 이희영(李喜英), 이희성(李喜成)이다. 1769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을 스승으로 섬기고 백탑시사(白塔詩社)를 결성하였다.이 시절 그는 정철조(鄭喆祚), 서상수(徐常修), 이덕무(李德懋), 유련(柳璉),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김용겸(金用謙), 임배후(林配○), 박재선(朴在先), 김순필(金舜弼), 백동수(白東修) 등 이른바 ' 연암 그룹'과 어울려 학문을 연마하였다. 1780년(정조 4)에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홍천협(洪川峽)으로 들어가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구전법(區田法)을 실시하여 많은 수확을 거두기도 하였다. 1782년(정조 6) 10월에 남덕신(南德新)과 함께 1차로 연행을 하였다. 1786년(정조 10) 8월에 유득공의 추천으로 대리검서(待理檢書)의 천망단자(薦望單子)에 올랐으나 입격하지 못하였다. 그해 겨울에 2차 연행하여 연경의 문사인 진숭본(陳崇本), 대구형(戴衢亨) 등과 시도(詩道)와 중국의 전각(纏脚)제도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스승 박지원과 함께 와서(瓦暑)에다 중국의 기와 굽는 법을 설치하고 벽돌 제도 역시 중국의 제도를 본떠 벽돌 만드는 비용을 상당히 절감하였다. 1790년(정조 14) 그의 나이 46세 때 유득공, 박제가와 함께 상사막객(上使幕客)의 자격으로 제 3차 연행을 하였다.이 여행에서 열하로부터 고북구를 두루 여행한 뒤 '입연기(入燕記)'를 지었다. 당시 그곳에서 보고 들은 벽돌 제도에 관한 설명은 '설수외사(雪岫外史)'에 실려 있다. 1794년(정조 18)에 제 4차 연행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물레방아의 제도를 자세하게 관찰하여 기록하였다. 1799년(정조 23) 그의 나이 55세 때 조정으로부터 주자서 10여 종을 구입해오라는 명을 받고 제 5차로 연행을 하였다. 1801년(순조 1)에 4월에 동생 이희영(李喜英)이 강이천(姜彛天) 등의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이희영은 당대 저명한 화가인 정철조를 사사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누가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상을 그리는 등의 일을 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1805년(순조 5)에 '설수외사'를 편찬하였다. 그해 10월 20일에 스승 박지원이 서거 하였는데, 그는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 함께 스승의 임종을 지켜봤다. 그는 연암의 수제자로 이용후생의 학문을 그대로 계승한 인물이다. 그는 박제가와는 둘도 없는 막역한 친구였는데 그 역시 서출의 신분을 지녔다. 특히 그는 무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이소도 서출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신분적 질곡을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의 길을 걷는 대신 '실학'으로 농공상의 이익을 대변해야겠다는 자기각성을 하게 되었다. 그는 백성들의 가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심명물리(深明物理)' 즉 물건의 이법을 널리 밝게 연구하여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자는 과학적 사유를 생활현장으로 끌어들여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고는 연행을 통한 청의 선진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더욱 발전하여, '농기도(農器圖)'의 저술과 수차의 일종인 용미거(龍尾車)의 제작, 그리고 벽돌의 제작과 사용 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