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백응(伯應). 호는 설창(雪○). 아버지는 좌승지에 추증된 홍달(弘達)이며, 어머니는 전주유씨(全州柳氏)로 수창(壽昌)의 딸이다.
큰아버지 홍도(弘度)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벼슬의 뜻을 끊고 오직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여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썼다. 성리학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의 서적들도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역학(曆學), 의술(醫術), 산학(算學)에 조예가 깊었다.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나 최석정(崔錫鼎), 민창도(閔昌道)가 여러번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무예에도 능하여 당시 군수가 북벌정책에 참여하기를 권하고는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또한, 서예에도 뛰어나서 '동현실록 東賢實錄' 등 여러 문헌에 그의 서법이 절묘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경상남도 지역의 누대, 헌(軒), 정(亭), 당(堂)의 편액(扁額) 중에 그의 글씨가 많이 전한다. 1745년(영조 21)학문과 덕행으로 사헌부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설창문집' 2권 1책이 있다.
큰아버지 홍도(弘度)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벼슬의 뜻을 끊고 오직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여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썼다. 성리학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의 서적들도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역학(曆學), 의술(醫術), 산학(算學)에 조예가 깊었다.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나 최석정(崔錫鼎), 민창도(閔昌道)가 여러번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무예에도 능하여 당시 군수가 북벌정책에 참여하기를 권하고는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또한, 서예에도 뛰어나서 '동현실록 東賢實錄' 등 여러 문헌에 그의 서법이 절묘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경상남도 지역의 누대, 헌(軒), 정(亭), 당(堂)의 편액(扁額) 중에 그의 글씨가 많이 전한다. 1745년(영조 21)학문과 덕행으로 사헌부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설창문집' 2권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