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우하영(禹夏永)
  • 단양우씨(丹陽禹氏),  출생~사망 : 1741 ~ 1812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대유(大猷). 호는 취석실(醉石室). 정서(鼎瑞)의 아들이며, 큰아버지 정태(鼎台)에게 입양되었다. 7세 때부터 할아버지 보상(寶相)에게 글을 배웠고, 15세부터 과거공부를 시작하여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회시(會試)에서만 12번 낙방하는 등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 만연하였던 과거 부정 이나 관직 구걸 운동을 마다하고 시골의 유생으로 평생을 보낸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농촌지식인이었다. 그는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고 사회실정을 체험하는 한편, 옛 문헌과 당대 제가들의 논설을 널리 읽고 수집하여 국가, 사회의 경영 및 개혁방안을 종합 저술하였는데 그것이 '천일록 千一錄'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 전제(田制), 군제, 국방, 관제, 농업기술문제 등에 관한 그의 독창적인 사상과 정책을 기술한 것이다. 1796년(정조 20) 조정의 구언교서(求言敎書)가 내리자 그는 이를 간추려 정리하여 책자로 만들어 바쳤고, 1804년(순조 4)의 구언 때 이를 다시 보완하여 '천일록'이라는 제명으로 조정에 상정하였으나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전자는 '수원유생우하영경륜 水原儒生禹夏永經綸'이라는 제명으로, 후자는 '천일록'이라는 표제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사회, 경제사상의 핵심은 권농정책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권농관(勸農官)의 설치, 권농절목 마련, 농서반포, 수차(水車)보급, 양전과 조세의 공평, 농지확장 등을 주장하였고, 무위도식자나 부유자(浮遊者)를 엄벌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또 상업적 농업과 시장경제에 의한 정당한 이윤추구를 인정하였고, 공명첩(空名帖)에 의한 부농의 신분상승을 긍정하였다. 그러나 농민층의 분화에 의한 전통적 공동체의 해체를 우려하였고, 상민들의 양반 멸시를 용납하지 않았다. 또 당시의 광작(廣作)농업경영을 비판하고, 화성장시(華城場市)에서 외부 행상의 금절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의 의식에 실학적 근대성이 형성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전통적 양반사회의 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한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의 광범하고 창의적인 개척정책은 당시 농촌지식인들의 의식성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것이었으나, 국가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도 못하였고 또 별다른 주목을 받지도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