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학자, 의병장. 자는 성재(聖哉). 호는 국담(菊潭). 세붕(世鵬)의 후손으로, 각(珏)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근사록'과 '주자대전'을 탐독하고 '위학입교도 爲學立敎圖'와 '오륜론 五倫論'을 지어 실천에 힘썼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에 진출, 관찰사 황선(黃璿) 으로부터 김해진군(金海鎭軍) 3, 000명을 지원받아 영호(嶺湖)의 요새인 분치령(分峙嶺)을 방어하였다. 또한, 그때 군량을 보급하기 위하여 가산을 팔아 쌀 300섬을 내어놓았다. 난이 평정된 뒤 고향에 돌아와 학문연구와 훈고(訓○)에 전심하였으며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관찰사 황선과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조정에 그를 천거하였으나 등용되지 않았다. 죽은 지 3년 뒤인 1745년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으며, 1783년(정조 7) 영남유생의 상소로 정려(旌閭)되고 이어 1788년 기양서원(沂陽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중용'과 '대학'을 주석한 '용학강의 庸學講義', '논어', '맹자', '주역' 등을 추연한 '경의집록 經義輯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예설을 집약한 '거가요범 居家要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