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종휘(李種徽)
  • 전주이씨(全州李氏),  출생~사망 : 1731 ~ 1797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 역사학자. 자는 덕숙(德叔). 호는 수산(修山). 병조참판을 지낸 정철(廷喆)의 아들이다. 그의 개인적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나, 집안이 소론에 속하며, 양명학 학풍에 친밀한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고, 그 자신 공주판관의 벼슬을 지냈던 일이 있다. 그의 학문적 기본입장은 주자학의 폐쇄성을 벗어나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긍정함으로써 학문적 기초를 확보하고 있다. 그는 우주가 생겨난 이래 가장 탁월한 명사(名士)로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 왕수인(王守仁)의 세 사람을 들고, 왕수인은 재주〔才〕에서 제갈량과, 공적〔功〕에서 장량과 비슷할 뿐 아니라 지조〔節〕에서는 가장 뛰어났다고 극찬하였다. 또한, 육왕학(陸王學)이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심학(心學)을 이어왔음을 지적하고, 정주학(程朱學)이 실천에서는 육왕학에 못미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수인의 문제점으로 '대학'을 잘못 읽었다고 지적함으로써, '대학' 해석에서는 주희(朱熹)가 옳고 심학에서는 왕수인이 정당한 것으로 양면적 긍정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이 시대 유학의 가장 큰 사업은 주자학과 양명학 사이의 입문(入門)과 통로〔路脈〕를 변별(辨別)하는 것이라 강조함으로써, 주자학과 양명학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인식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제자백가의 서적이 있음으로써 사서(四書)의 훌륭함이 드러나는 것처럼, 육구연(陸九淵), 왕수인의 심학이 있음으로써 정주학이 드러나는 것이라 하여, 정통주의적 정주학에서 입장이 다른 모든 사상에 대하여 이단으로 배척하는 폐쇄적 태도의 잘못됨을 비판하였다. 그 자신의 심학에서는 양지(良知), 근독(謹獨), 성(誠)의 개념들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는 양명학적 역사관에 기초한 역사연구를 통하여 독자적인 사학체계(史學體系)를 제시함으로써 중대한 업적을 남겨주고 있다. 그는 사학(史)과 경학(經)이 표리관계를 이루며, 서로 날실〔經〕과 씨실〔緯〕로 짜여져 하나의 경사(經史)를 이루는 것으로 파악한다. 동료 홍양호(洪良浩)는 이종휘의 학문체계를 가리켜, 경술(經術)을 체(體)로 삼고 문장과 사학(史學)을 용(用)으로 갖추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한쪽에만 치우쳐서 학문의 전체성과 균형성을 잃어버린 편협함의 오류를 탈피한 것이다. 또한, 그는 옛 역사(古史)를 지나간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더욱 빛나는 것이요, 내 마음으로 말미암아 더욱 값지게 전달되는 것(由我而益傳)임을 역설하여, 역사인식에서 주체적 정당성을 중시 하였다. 대표적 역사저술인 '동사 東史' 에서는 전통적 역사관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매우 창의적으로 응용하고 있다. 단군­기자­삼한­후조선으로 이어가는 민족의 기원을 확인하고, 부여, 발해를 중시하여 만주땅을 고토(故土)로 인식하며, 특히 고구려를 역사계승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도학적 역사관의 중화주의적 의리사관(義理史觀)과 구별되는 민족사관의 단초를 볼 수 있다. 동시에 역사와 지리를 결합하여 해석하고 고증해감으로써 실학파 역사연구의 일환으로 중요한 업적이 되고 있다. 신채호(申采浩)는 그의 역사인식에 대하여 '단군 이래 조선의 고유한 독립적 문화를 노래하였으며, 김부식(金富軾) 이후 사가(史家)의 노예사상을 갈파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옛 습속을 개혁하고 국가의 미 약한 세력을 강하게 바로잡는 개혁론적 관심과, 과거제도, 변경방어 등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는 실학적 사회의식을 보여주었다. 문집으로 '수산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