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위백규(魏伯珪)
  • 장흥위씨(長興魏氏),  출생~사망 : 1727 ~ 1798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 계항(桂巷), 계항거사(桂巷居士). 장흥 출신. 진사 문덕(文德)의 아들이다. 처음에 증조부에게 수학하였으나 유년기를 지난 뒤에는 자수면업(自修勉業)하였다. 어려서부터 제가서(諸家書)를 탐독하여 학문적 자세를 굳힌 그는 향리의 장천재(長川齋: 장흥의 관산면 방촌리)에 기거하면서 면학과 교화의 일익을 담당하였고, 1750년(영조 26) 학행으로 향천(鄕薦)을 받기도 하였다. 1751년 스승 윤봉구(尹鳳九)를 만나 그뒤 1766년까지 경서, 의례,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관한 논의를 통하여 학문적 계도를 받았다. 과거에 계속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고, 그뒤 68세가 되던 1794년(정조 18) 서영보(徐榮輔)의 천거로 그의 저술과 덕행이 정조에게 알려져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 기장(機張), 태인, 옥과현감,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경기전령(慶基殿令) 등을 차례로 지냈다. 그의 학통은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권상하(權尙夏), 윤봉구로 이어지는 노론계이나, 향촌생활을 통하여 형성된 강한 현실비판의식이 저술에 나타나고 있어 그의 학문적 성격은 경세적 실학의 색채가 짙다. 경전의 이해나 심성론, 이기론에서는 전통성리학자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정현신보 政鉉新譜' 나 봉사류(奉事類)에서 당시의 현실을 세세하고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어 그의 실학자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의 주장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향촌사회개선론이라 할 수 있는데, 첫째 지방교육 개선을 통하여 향촌질서의 유지와 교화뿐만 아니라 관리선발, 지방관리의 경제기능까지도 담당할 것을 주장하였고, 둘째 정치기강의 해이와 이에 따라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관제축소, 향촌의 자율적 공평부세론, 지방관리선도책 등을 구상하고, 셋째 향촌방위체제의 견실을 주장한 점이다.이 향촌사회개선론을 일관하는 기본구상은 향촌의 자율성모색과 공의(公議)의 구현으로 집약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향촌사회의 지식인들이 자율성과 공의창달의 주도자로서, 또는 중간계층으로서 사회의 견제 및 비판과 민중옹호의 양면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경세론 외에도 경학, 지리, 역사, 의학 등에 관한 저술이 문집 '존재집 存齋集' 22권 속에 망라되어 있어 그의 학문폭은 매우 넓고 다양하였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에 대한 후인의 인물평이나 저술과는 달리 그의 교우관계나 후학은 매우 소략, 묘연하여 밝히기가 힘들다. 이것은 그가 호남의 벽지에서 무명의 선비로 거의 전생애를 보냈기 때문이다. 1805년(순조 5) 향리유생들의 발의로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존재집', '정현신보', '사서차의 四書箚義', '환영지 ○瀛誌', '본초강목 本草綱目', '고금 古琴', '격물설 格物說', '원류 原類', '연어 然語'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