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성재(聖載). 호는 월암(月巖) 또는 칠탄(七灘). 진수(眞洙)의 아들이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학행이 높아 천거를 받아서 참봉이 되었다. 또한, 그의 학식과 덕행이 높았고 문장이 뛰어나 당시 사림의 제1인자였다고 한다. 그의 문장에 대해서 이만수(李○秀)는 그의 문집에서 '국조(國朝) 300년의 문교를 받아 이광려 선생을 낳았다.'고 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인품도 훌륭하였고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인물이었기에 따르는 제자가 많았고,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제자인 신대우(申大羽)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하던 당시의 시대 흐름 속에서 일찍부터 책을 통하여 고구마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였다. 그래서 1763년(영조 39)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趙○)이 대마도 로부터 고구마를 들여오자 곧 재배에 착수하였으나 기술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시도는 당시 동래부사 였던 강필리(姜必履)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어서 고구마재배에 성공을 거두게 하였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 길이 없어서 애석한 일이나 그의 문명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저서로는 '이참봉집 李參奉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