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학자. 초명은 충. 자는 이강(而强). 호는 명암(明巖). 첨정 분(賁)의 아들이다. 이씨부인과의 사이에 덕수(德秀), 덕순(德純), 덕무(德懋)를 두었다. 작은아버지 주(胄) 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사림간에 명망이 높았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영산(靈山)에서 후진을 양성, 1519년(중종 14)4월 기묘사화로 선산에 유배된 스승 김식이 화를 피하여 도주하여 오자 은신시켰다가 김식을 수행하여 온 이신(李信)의 밀고에 의하여 의금부에 수금되었다. 김식을 증오한 심정(沈貞)이 장살(杖殺)을 꾀하여 가혹하게 곤장을 치자 '이미 은닉하였음을 자복하였는데 다시 곤장을 침은 무슨 이유인가. '라고 항변하여 생명을 부지한 뒤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그뒤 영산에 거주하는 동생 용(庸)이 매년 포목을 보내고 종들을 보내어 유배지 주위의 농지를 개간하여 식량에 충당하게 하는 등의 배려로 자활하였다. 1532년 사면되고, 학행으로 예조정랑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영산의 덕천서원(德泉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