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희지(希之). 호는 유연당(悠然堂). 경상북도 영주 출신. 아버지는 장례원사의(掌隷院司議) 농중(農中)이며, 어머니는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권일(權鎰)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1582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이덕형(李德馨)과 김륵(金○)의 추천으로 1595년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이 되고 뒤이어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이 되었는데, 이때 명나라 장수 형개(邢○)의 접대낭청(接待郞廳)에 선발되었으며, 곧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승진되었으나 물러나 영주에서 이산원(伊山院) 원장에 피선되었다. 1601년에 산청현감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고향에서 향병을 모아 안집사(按集使) 김륵의 휘하에 들어가서 민심수습에 공헌하고 난이 끝난 뒤에는 기민구제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황(李滉)을 해동공자로 부를 만큼 존숭하였으며, 이로써 그의 학문과 사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도잠(陶潛)을 매우 좋아해 스스로 당호를 '유연당'이라 하였다. 저서로는 '유연당선생문집' 4권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