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 서울 출생. 전라도관찰사 중홍(重洪)의 증손으로, 교하현감 훈(壎)의 손자이고, 병조좌랑 세준(世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손준(孫濬)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질을 보였으며, 여러번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복시(覆試)에서 실패하였다. 학행으로 1572년(선조 5) 경주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고, 연이어 수령, 도사, 장원(掌苑)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당시 안민학(安敏學)이 자주 찾아와 정철(鄭澈)을 칭찬하고 만나볼 것을 권하였지만, 단호히 거절하였다. 1575년 선대의 전장(田庄)이 있는 진주의 도동(道洞)으로 은거하였다. 마침 나라에서 사축(司畜)에 제수하고 그를 부르자, 잠시 나가 취임하였다가 곧 그만두었다. 정구(鄭逑), 김우옹(金宇○), 오건(吳健), 하항(河沆), 박제인(朴齊仁), 조종도(趙宗道) 등과 교유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1576년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창건하여 스승 조식을 배향하였으며, 이듬해 외아들 홍렴(弘濂)이 죽는 불행을 겪었다. 1581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이 상소에서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다. 1585년 '소학', 사서(四書)의 언해를 위한 교정청낭청(校正廳郞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90년 정여립역옥사건(鄭汝立逆獄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유령의 인물 삼봉(三峯)으로 무고되어 옥사(獄死)하였다. 당시 정적 정철 과의 사이가 특히 좋지 않아 그의 사주로 죽은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1591년 신원(伸寃)되어 대사헌에 추증되고, 사제(賜祭)의 특전이 베풀어졌다. 1611년(광해군 3) 산청의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