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풍후(風后). 호는 이소재(履素齋). 아버지는 정고(精高)이며, 어머니는 성산이씨(星山李氏)이다. 유우(柳藕)의 문인이다. 천거로 여러 차례 교직(敎職)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6품직에 제수되었다. 그는 평소에 과거공부를 폐하고 도학에 전력하여 구용(九容), 구사(九思) 및 경(敬), 의(義)로써 몸과 마음가짐의 규칙을 삼고, 제자들에게 '소학', '근사록' 등을 우선적으로 가르쳤으며, 서경덕(徐敬德)과 예설을 강론하여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김안국(金安國) 으로부터 귀신이 아니면 이러한 문장을 지을 수 없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심성도설 心性圖說', '성리명감 性理明鑑' 등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