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신급(申礏)
  • 평산신씨(平山申氏),  출생~사망 : 1543 ~ 1592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중준(仲峻). 조부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문절공(文節公) 신상(申○) 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기묘명현(己卯名賢)이다. 아버지 신화국(申華國)은 성균생원으로 별검(別檢)에 임명되었으며, 영의정(領議政) 평주부원군(平洲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첨정(僉正) 윤회정(尹懷正)의 딸이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오직 충성과 효도, 절의(節義)에 힘썼으며,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어머니를 모시고 왜변(倭變)을 피하여 이천(伊川)으로 갔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 어머니가 절벽에 몸을 던지자 따라서 몸을 던졌는데 다행히 어머니는 죽지 않았으나 그는 운명을 다하였다. 동생 신립(申砬)이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여러 차례 변방에서 공을 세워서 6품(品)의 벼슬을 하사받았다. 그 후 판윤공(判尹公) 신립은 왜적을 막다가 충주(忠州)의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동생 신할(申○)은 병사(兵使)로 임진(臨津)에서 왜적과 전투하여 절개가 드러났다. 1703년(숙종 29) 신급의 문려(門閭)에 정려(旌閭)하도록 명이 내렸고, 1713년(숙종 39)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추증되었다. 충의위(忠義衛) 윤인흡(尹仁洽)의 딸과 결혼하여서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신경기(申景祺)는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이고, 다음 신경복(申景福)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