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중수(重綏). 호는 사은(四隱). 익산 출신. 대사간 세량(世良)의 증손이며, 현감 민선(敏善)의 아들인데, 서윤(庶尹) 응선(膺善)에게 입양되었다. 김은휘(金殷輝)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된 뒤 성균관에 들어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혼(成渾) 으로부터 출사할 것을 여러 차례 권유받았으나 스스로 학문이 미진함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의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용화산(龍華山)에 설책(設○), 향토방위에 참여한 일이 있었으며, 난후 국정 전반에 관한 시무책(時務策)을 조정에 올려 가납(嘉納)되기도 하였다. 1601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수천권의 서책 속에 묻혀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605년 김장생(金長生)이 익산군수로 있을 때 매번 그의 방문을 받아 군정자문(郡政諮問)에 응하였으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경전(經典), 사서(史書) 등 귀중한 전적들을 나라에 기증하여 궁중의 비서각(○書閣)에 비치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 무렵 향리 일대가 한해로 인하여 매년 흉년을 겪게 되자 40여리에 달하는 수로건설을 건의, 그것이 이루어짐에 따라 주위의 농민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경학(經學)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복(醫卜), 병법(兵法), 관방(關防)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했으며, 성혼에게 종유(從遊)하는 한편 조헌(趙憲), 정경세(鄭經世), 한백겸(韓百謙), 황신(黃愼) 등과의 친교가 두터웠다. 광해군 때 조카 명국(鳴國)이 대북, 소북간의 당쟁에 관여하여 결국 몰락하기에 이르자, 이에 연좌되어 대명(待命) 중에 질병을 얻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