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자용(子容). 호는 농재(聾齋). 경주 출신. 영의정에 증직된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소(召)의 딸이다. 대학자인 형 언적(彦迪)에게 글을 배웠다. 시끄러운 세상에 뜻을 두지 말고 귀먹은듯 살아가라는 현인의 가르침에 따라 농재 라 자호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1545년(인종 1) 학행으로 추천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임명되고, 이듬해 주부로 승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47년(명종 2) 송라도(松蘿道)의 찰방이 되었는데, 관할 역민의 부역을 경감하고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형 언적이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몰려 북청에 유배되자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지어 윤원형의 전횡을 규탄하였다. 성리학과 경전에 밝았고, 후진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경주의 덕계사(德溪祠)와 덕연사(德淵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농재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