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자앙(子昻). 호는 양호(楊湖). 고려 때 명상(名相) 영모(令謨)의 15세손으로, 우중(友仲)의 아들이며, 우맹(友孟)에게 입양되었다. 5세가 되면서 양부모가 살던 양호로 내려가 외숙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14세 때 폐모(廢母)시키는 광해군의 패륜을 보고 과거의 뜻을 버렸으며, '맹자'를 읽다가 새삼 성현의 학문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장생(金長生)과 장현광(張顯光)에게 배움을 청하였으며, 특히 김장생이 충청도 연산(連山)으로 돌아갈 때는 따라가 '대학'과 '가례 家禮' 등 제서(諸書)를 배웠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생모 김부인을 모시고 입경하였는데,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의 소식을 듣고 자결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1650년(효종 1) 김집(金集)과 더불어 국가의 대사(大事)에 대하여 의논하기도 하였다. 그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1653년 내시교관(內侍敎官), 1655년 창릉참봉(昌陵參奉), 1660년(현종 1) 동몽교관(童蒙敎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뒤 다시 양호로 내려가 살다가 67세에 서울에서 죽었다. 품성이 단아하고 고결하였으며, 정학(正學)에 몰두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다. 특히, 학문에 있어서 이기(理氣)의 본원(本原)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이이(李珥)의 설로 결단하였다. 저서로 '양호유고 楊湖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