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성지(成之). 호는 진락당(眞樂堂) 또는 서산(西山). 아버지는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김광좌(金匡佐)이며, 어머니는 임씨(林氏)로 임무의 딸이다.
일찍이 박영(朴英)의 문하에 들어가서 '중용'과 '대학'의 깊은 뜻을 배워 존심양성(存心養性)의 방법과 관물성찰(觀物省察)의 묘지(妙旨)를 터득하고,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묘용(妙用)을 배워 그 이치를 깨달았다. 한평생을 학문탐구에 몰두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만년에는 당시의 대학자이며 재상이었던 김정국(金正國)과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네 차례나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한번도 부임하지 않았다. 또한, 의학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함으로써 약성(藥性)과 경락(經絡)에 대한 지식이 깊어 병든 사람을 많이 치료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수천인에 이르렀다고 한다. 저서로는 '진락당집'이 있다.
일찍이 박영(朴英)의 문하에 들어가서 '중용'과 '대학'의 깊은 뜻을 배워 존심양성(存心養性)의 방법과 관물성찰(觀物省察)의 묘지(妙旨)를 터득하고,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묘용(妙用)을 배워 그 이치를 깨달았다. 한평생을 학문탐구에 몰두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만년에는 당시의 대학자이며 재상이었던 김정국(金正國)과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네 차례나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한번도 부임하지 않았다. 또한, 의학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함으로써 약성(藥性)과 경락(經絡)에 대한 지식이 깊어 병든 사람을 많이 치료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수천인에 이르렀다고 한다. 저서로는 '진락당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