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비승(丕承). 호는 원모당(遠慕堂), 사재(思齋) 또는 연담(蓮潭). 전라도 태인(泰仁) 출신. 회련(懷鍊)의 후손이며, 이항(李恒)의 문인이다. 정여립(鄭汝立)이 혼인하기를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고, 또 정여립이 유상대(流觴臺)에 이르러 그를 청하였으나 병을 핑계하고 응하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귀(李貴)가 장성(長城)에서 의병을 모집하자 이에 참여, 이듬해 장정 100여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가서 선조를 배알한 다음 곡식을 모아 뱃길로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 바쳤고, 또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에게도 군량을 보냈다. 뒤에 군자감직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경학에 밝았고, 특히 역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군기시정에 추증되었으며, 태인의 남천사(南川祠)에 봉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