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황종해(黃宗海)
  • 회덕황씨(懷德黃氏),  출생~사망 : 1579 ~ 1642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대진(大進). 조부는 황윤림(黃潤琳)이고, 부친은 황덕휴(黃德休)이다. 모친은 창녕성씨(昌寧成氏) 참봉(參奉) 성우(成羽)의 딸이고, 아내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이홍벽(李弘璧)의 딸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업을 받았다. 1610년(광해군 2)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1611년(광해군 3)에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 등을 모함하자 양호(兩湖)의 제생(諸生)들과 함께 상소하여 정인홍을 논척하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광해군이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자 과거 공부를 폐하고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후 장유(張維)가 천거하여 후릉참봉(厚陵參奉),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제수 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아니했다. 1632년(인조 10)에 최명길(崔鳴吉)과 목서흠(睦敍欽)의 천거로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아니했다. 그리고 1640년(인조 18)에 6품에 서용되어 장원별제(掌苑別提)가 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아니하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도학(道學)에 깊은 관심을 가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만나 예(禮)를 논하고 묻기도 하였다. '퇴도선생산거시발(退陶先生山居詩跋)', '심성정리기설(心性情理氣說)' 등의 문장을 지었다. 또한 남전향약(藍田鄕約)을 손익(損益)하여 '촌규범례(村規凡例)' 46조(條)를 만들기도 하였다. 1642년(인조 20) 12월 24일에 졸하니, 문인(門人) 안여룡(安汝龍), 김광훈(金光勳) 등이 장례를 맡아 삼생동(三生洞)에 장사를 지냈고, 1650년(효종 1)에 죽림서원(竹林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인 '후천집(朽淺集)'은 1713년(숙종 39)에 증손 황응하(黃應河)와 종증손(從曾孫) 황찬(黃燦)이 고성현(固城縣)에서 간행했다. 문집은 시, 편지, 문답(問答), 소차, 잡저 등이 실려 있으며, 원집(原集) 8권, 부록(附錄)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