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군신(君愼). 호는 구봉(九峯). 아버지는 강릉참봉(康陵參奉) 태을(太乙)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로 참봉 휘(輝)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작은아버지 태허(太虛)가 울산군수로 화왕산(火旺山)을 지키고 있을 때 옆에서 계책을 세워 많은 전공을 세우게 했다. 1603년 사마시에 합격, 태학(太學)에 있을 때 장의(掌議)의 신분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광해군을 간하기 위하여 '전은소(全恩疏)'를 올리고, 석고대죄한 지 7일 만에 낙향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다시 태학으로 돌아왔다. 평생에 '논어'와 '대학'을 읽어 성(誠)과 경(敬)으로써 일신의 수양지침을 삼았고, 성리학은 정구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였다. 정경세(鄭經世), 이윤우(李潤雨) 등과 교유하였다. 울산 덕양사(德陽祠)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구봉문집' 4권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