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군수(君受). 현령 응광(應光)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짓기 좋아하고 맑고 높은 기상이 있어 권필(權○)과는 특별히 친밀한 사이였다. 그러나 이이첨(李爾瞻)과는 상종을 거부하여, 광해군 당시 북인정권하에서는 서울에 있기를 싫어하여 교하(交河)에 복거(卜居)함으로써 문을 닫고 단정하게 지냈다. 온유한 성격이었으므로 당시의 기휘를 피하고 남을 일체 비방하지 않았으며, 이목에 접하는 바 모든 것은 반드시 음영(吟詠)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뒤에야 벼슬에 나아가서 나이 60이 되어서야 장원서별좌(掌苑署別坐)가 되었고, 이때의 제조 였던 정경세(鄭經世)가 하급관료 정도의 재목이 아님을 알고 적극 추천하여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인조반정 때 원종의 공로가 있었으므로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