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공근(公瑾). 호는 만학당(○學堂). 한성 출신. 공조참판 흥립(興立)의 증손이며, 현감 명전(命全)의 아들이다. 8세에 고종형 유념(柳○)에게 수업을 시작으로 학문의 길을 걸어 외부로 향하는 마음을 끊고 오로지 학문탐구에 전념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숭정처사(崇禎處士)라 부르며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바깥일을 사절한 채 학문탐구에 더욱 정진하였는데, 책을 읽을 때면 침식조차 잊었다. 1672년(현종 13) 재주와 덕망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77년(숙종 3) 사직참봉(社稷參奉)을 제수받고 잠시 나가 있다가 곧 사직하고 돌아왔다. 1678년 상소로써 심학성리(心學性理)의 요체와 당론을 억제하고 현재(賢才)를 가려쓰는 데 대한 설을 개진하였으며, 또 동년배 유형원(柳馨遠)의 저서인 '반계수록 磻溪隨錄'에 보인 전제(田制), 병제(兵制), 학제(學制) 등의 7조를 시행하자고 건의하여 숙종이 이를 가상하게 여겼다. 서울에서 전원으로 돌아온 뒤 만력동(萬曆洞)에 집을 짓고 만학당(○學堂)이라 편액을 단 뒤 '대학', '근사록 近思錄'의 취지와 요지 및 각 경전의 난해하고 의심스러운 것 들을 손수 베껴가며, 심성정이기(心性情理氣)의 설을 깊이 연구하였다. 언제인가 유형원 과의 왕복 논란에서 질문이 하도 조리있고 치밀하여 유형원도 그의 학식과 도덕을 높이 칭송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