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학자, 효자. 자는 군거(君擧). 호는 삼가정(三可亭). 승휴(承休)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감찰(監察) 이중원(李仲元)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모친상을 당한 뒤로는 과거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연산군 때 단상법(短喪法)이 엄하였으나 그는 모친상을 당하자 선왕(先王)의 제도를 어길 수 없다 하여 3년 동안 최복(衰服)으로 여막에 살았으며, 중종반정 후에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1516년(중종 11) 김정(金淨)이 풍악산(楓嶽山)에서 오는 길에 그의 집을 방문하여 며칠을 머물다가 작별할 때 척촉장(○○杖: 철쭉나무의 지팡이)을 선물하며 시를 지어 '깊은 산 층암절벽에 찬서리 흰눈을 겪은 가지일세. 가지고 와서 그대에게 주노니 오래도록이 마음 간직하게나. '라 하니, '참뜻을 잃을까 의심스러워 궁촌에 살고 있으나 곧은 성품 남몰래 간직했으니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으리. '라고 화답하였다. 뒤에 현량(賢良)으로 천거된 그는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때 용궁 고을에는 송사가 많았으나 판단을 명석하고 빠르게 하여 적체된 송사가 없었다. 이어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등을 지내고 1519년(중종 14) 겨울에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와 당숙인 박공달(朴公達)과 쌍한정(雙閑亭)에서 시와 술과 담론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천성이 순수하며 후하고, 지조가 구차하지 않으며 소박하고, 눌(訥)하며 꾸김이 없고 효행이 있었으며 뜻이 독실하였다. 저서로는 '삼가집'이 있다. 1645년에 향중이 사당을 세워 향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