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는 황중(黃中). 호는 정허와(靜虛窩). 동영(東榮)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경전을 탐독하였으며 특히 정주학(程朱學)에 전심하였다. 사부(詞賦), 전표(箋表), 논책(論策), 시율(詩律) 등에 뛰어났고, 1803년(순조 3)에 증광진사(增廣進士)에 합격한 뒤 학문연구에 전심하는 한편 후학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향학(鄕學)에서 관찰사에게 두번이나 천거하였으나 채용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심성이기(心性理氣)의 분별과 유석왕패(儒釋王覇)의 도리를 논변하여 기록하고, '의례', '가례'의 문목과 향음례도(鄕○禮圖)를 해설하였으며, 경전을 분류하여 '기범연의 箕範衍義' 4권을 지었다. 또,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의 병환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렸으며, 임종 때 당질(堂姪)을 불러 '반족(班族)이 세가지 종류가 있으니, 사환(仕宦)과 세덕(世德)과 조행(操行)이다. 사자(士子)로서는 조행을 삼가는 데 힘쓰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