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의병. 호는 습재(習齋). 1852년(철종 3) 8월 7일 춘천부(春川府) 남산(南山)에서 이도재(李道栽)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2세에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배웠다. 그의 누이가 유중교의 아들 유의석(柳毅錫)에게 출가함으로써 유중교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1876년(고종 13)에 동문 50여 명과 함께 대궐문 앞에 나아가 '척양소(斥洋疏)'를 올렸다. 38세에 유중교를 따라 제천의 장담(長潭)으로 이주하였다. 1895년(고종 32) 그의 나이 44세 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해 소식을 듣고 그는 유림(儒林)의 뜻에 따라 춘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고 관찰사(觀察使) 조인승(曹寅承)을 주살하였다. 그러나 증원된 관군과 일본군의 저항으로 한양(漢陽)으로 진격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충주(忠州) 유인석(柳麟錫)의 진영으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98년(광무 2)에 유인석과 함께 만주 통화현 오도구로 망명하였다. 1900년(광무 4)에 중국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귀국하였다. 1907년에 자신의 서당인 자양영당(紫陽影堂)을 준공하였다. 이곳의 장판각(藏板閣)은 유중교와 중암(重庵) 김평묵(金平○)의 필생의 역작인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의 판각을 보존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에 검거되어 10여 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는데, 1911년에 다시 만주 봉천성 회인현 대황구로 망명하였다. 1928년 3월 25일 몽고 사막지대인 강평현 제7구에서 향년 68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다. 저서에 춘천의 의병운동과 유인석, 유의진의 활동 상황을 기록한 '습재연보(習齋年譜)', '습재선생문집(習齋先生文集)'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습재는 화서 문하의 두 거봉인 중암과 성재 유중교를 사사하였지만 주로 유중교에게 수학하였으며 동문 선배였던 의암(毅菴) 유인석을 선생으로 받들면서 화서 학파의 학통을 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학문의 범위를 '거경으로 근본을 세우는 것(立本)', '궁리로 지식을 이루는 것(致知)', 그리고 '역행으로 실천하는 것(實踐)'의 3가지로 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는 입본을 체(體)로 여기고 치지와 실천은 지행의 문제로서 용(用)으로 분석하여 체용이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태극(太極), 이기(理氣), 심성(心性)의 성리학적 문제를 해명하면서도 심설(心說)에 가장 역점을 두었고, 천지의 운수와 연실의 정치와 유교의 이념을 일관시켜 해석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본성과 경전에 근거하여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척사위정론(斥邪爲正論)을 의리의 가장 큰 문제로 삼아 자신의 생애를 이를 실천하는 데 헌신하였다. 그의 성리설은 화서의 입장을 존중하는 데 있지만 유중교에 의해 제기된 '조보화서심설(調補華西心說)'에 따른 논쟁에서 유중교의 입장을 철저히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논쟁의 한쪽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심설주리주기론(心說主理主氣論)'이 지닌 문제의 성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면서 언제나 종합적인 안목에서 평가하여 객관적인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동시에 화서학파의 성리학적 입장과 문제점의 일관성을 제시해 주는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화서의 심설의 주지가 주리, 주기의 양쪽을 인식한 것이지만 주리로 언급하는 것은 당시의 심을 주기로 규정하는 입장의 허무공적에 빠지기 쉬운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태도에 따른 것으로 보고 주리로만 보면 방탕한 입장도 본래의 정신을 살릴 수 있게 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그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의 문제에 있어서도 성을 '동이이(同而異)'요 '이이동(異而同)'으로서 양면의 통일로 인식하여 어느쪽에 기울어지지 않는 조화적 지양을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