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의병. 자는 백형(伯亨). 호는 오천(鰲川). 아버지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내고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된 응정(應井)이며,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 주부(主簿) 숙견(淑堅)의 딸이다. 유년시절에 큰아버지인 응두(應斗)에게 '효경', '소학' 등을 배운 뒤 족형(族兄)인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기효간(奇孝諫), 정운용(鄭雲龍), 변이중(邊以中) 등과 학문을 강론(講論)하였다. 건릉참봉(健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이듬해에 다시 내섬시봉사(內贍寺奉事)에 제수되었는데, 모친상(母親喪)을 당해 사직했다가 삼년상을 치른 뒤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가 되었다. 1591년(선조 24) 정철(鄭澈)의 천거로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정철이 강계(江界)로 유배를 당하자 두문불출하였다.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제(從弟) 신남(信男) 및 두 아들 극후(克厚), 극순(克純)과 기효간, 윤진(尹軫) 등과 함께 장성(長城)의 남문(南門)에서 도내(道內)에 격문(檄文)을 띄워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에 그 공로로 인하여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승진하였다. 1601년에는 영의정 윤승훈(尹承勳)이 그의 충의(忠義)를 조정에 천명하였으며, 공조참판, 의금부동지사,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자 조정에서 여러 차례 상이 내려졌다. 죽은 뒤에 회계사(晦溪祠), 오산사(鰲山祠) 등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오천집' 2권 1책이 있다.